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윤동주 시인과 평양 숭실중 동기다. 같은 반에서 공부했지만 윤동주가 세 살 많았다. 신사 참배 거부로 학교가 휴교하자 윤동주는 만주 용정으로 떠났고, 그는 학교 대신 날마다 찾아간 평양시립도서관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철학과 문학의 세계였다. 1960~1970년대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와 함께 ‘철학자 겸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연 시작이었다.
백수(白壽)를 코앞에 둔 김 교수는 지난해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으로 다시 중장년층의 ‘멘토’로 떠올랐다. 지난 12일에는 제12회 유일한상을 받았다. 철학을 통해 교육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그의 삶과 정신이 유일한 박사(유한양행 설립자)의 고귀한 뜻과 맞닿아 있다는 게 유일한상 심사위원회가 밝힌 선정 이유다.
서울 연희동 원천교회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얘기를 듣는 2시간30분 동안 그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언론 인터뷰 요청부터 오는 4월 강연 요청까지 그의 지혜를 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김 교수는 요즘 두 권의 책을 쓰고 있고, 매주 한 번 이상은 강연을 나간다. 아직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1주일에 세 번 수영도 한다. 노 철학자는 젊음의 비결을 묻자 “정신이 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삶의 지혜를 온화하고 담담하게 들려주다가도 국가와 사회 문제에는 날카로운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 정국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체제가 성장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지배하는 ‘힘의 사회’, 법과 정의가 지배하는 ‘법치 사회’, 도덕과 윤리가 지배하는 ‘질서 사회’입니다. 질서 사회에 이른 여러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이제 겨우 ‘법치 사회’ 단계에 올라섰을 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해 “선한 의도에서 한 일이며 법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초점이 잘못된 말입니다. 시민들이 광장에 나온 것은 대통령과 측근들이 법을 어긴 것도 있지만 사회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질서 사회’란 어떤 사회입니까.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회가 질서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는 도덕적·윤리적 시민 의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1962년 처음 스위스에 갔는데 전국에 교도소가 딱 한 곳이랍니다. 죄수가 한 명도 없을 땐 교도소 문을 열고 흰 깃발을 올린다는데 1년에 서너 달은 그렇대요. 말 그대로 법 없어도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입니다. 폭력사태가 사라진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우리 시민들도 ‘질서 사회’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법에 사로잡힌 사고도 사회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항거하는 사람은 훌륭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 군사정권이 끝날 때까지 저항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00년 이상 이런 역사를 겪으면서 ‘흑백논리’가 체질화돼 버린 것이지요. 20세기 전반에는 냉전체제로, 이후에는 좌파·우파로 나뉘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역사적 인물도 공(功)과 과(過)를 보는 대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구분 짓지요. 하지만 물리학적으로 보면 흑과 백은 없습니다. 백에 가까운 것과 흑에 가까운 것, 회색 지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회색분자’ 하면 ‘나쁜 놈’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이분법을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보다 중요한 것은 ‘열린 사회’로 가느냐, ‘닫힌 사회’로 가느냐에 대한 논의입니다. 역사상 닫힌 사회를 추구한 국가는 모두 망했습니다. 열린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며 종교나 정치 이념이 달라도 더불어 사는 사회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 등 닫힌 사회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도 ‘편 가르기’ 하지 않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열린 사회로 갈 수 있을까요.
“요즘 사람들은 ‘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개선과 개혁을 시도하고, 그래도 안 될 땐 혁명입니다. 환자가 아프면 먼저 약을 먹이고, 안 되면 주사를 놓고, 정 위험하면 수술을 합니다. 혁명은 수술과 같습니다. 수술을 반복하면 환자는 죽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죽은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자꾸 혁명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혁명’을 주장하는 폐쇄적인 진보보다는 개방된 보수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꼭 해야 할까요.
“작은 민족이라고 해서 문화가 뒤지라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 강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인데 이들은 국민의 70% 이상이 100년 이상 독서를 한 나라입니다. 한국도 일본만큼 독서하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 그게 국력입니다. 사람도 콩나물처럼 계속 물을 줘야 자라는데 우리는 대개 40대쯤이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라버려요. 또 하나는 자신을 하나의 틀에 가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뤘는가’보다는 ‘무엇을 사랑했는가’를 생각하세요. 제 아버지가 강조한 말씀이 있어요. ‘나와 내 가정만 걱정하는 사람은 그 가정만큼만 커진다. 내 직장을 위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직장, 이웃만큼 커진다. 항상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면 민족과 국가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100년 가까이 살아 보니 그 말이 진리더군요.”
▷최근 인구센서스를 보면 무종교인이 크게 늘어서 ‘탈(脫)종교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20년 뒤에는 무교라고 응답하는 사람 비율이 70%, 100년이 지나면 80%가 될 것입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돼야 합니다.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는 종교의 역할이 점차 약해집니다. 교회는 ‘근본주의적 신앙’에 빠져 속박하고 구속하려고만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교인은 딱 자기 교회 목사 설교만큼밖에 크지 못합니다.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 ‘교회 정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진짜 ‘기독교 정신’은 무엇입니까.
“몇 년 전 친구들과 지난 100년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지도자를 꼽아봤더니 도산 안창호 선생, 인촌 김성수 선생, 유일한 박사, 서재필 선생 등이 공통적으로 뽑혔습니다. 모두 기독교인이고, 평신도였지요. 교회 출석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정신을 내 가치관으로 삼아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겁니다. 그게 바람직한 신앙인의 길이죠.”
▷기업가는 유일하게 유일한 박사를 꼽으셨네요.
“일제강점기에 기업을 했지만 흠이 없는 분입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미국 육군 전략정보처(OSS) 요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사회가 부패할까 봐 정치자금은 절대 내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죠. 정의란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인데, 이걸 실천하신 분입니다.”
▷책을 보니 60대를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나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60대가 되면 인생의 끝이라고 여겨요. 하지만 60대는 타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던 젊은 시절과 달리 내가 나를 믿어줄 수 있는 나이거든요. 젊은 시절 누리지 못한 행복도 깨닫게 됩니다. 젊을 땐 육체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정신적 즐거움을 행복으로 느끼기 시작해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고, 나와 사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때가 인생에서 제일 귀한 나이입니다. 저는 그게 60~75세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 가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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